남한산성 답사 여정/ 문화재란/만해 기념관 | 손병주 | 2007-05-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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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간단히나마 6.6.(수) 남한산성 여정을 소개합니다. 금번은 남한산성 중 일부를 답사하게 되는데, 현지 사정 및 여건에 따라 약간의 변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102, <수어장대에서 삼학사(三學士)를 생각하노라!>도 참조하시길...
* 여정 : 남한산성 답사.
산성전도
아래의 산성도를 참고하세요.
< 남한산성 답사 떠나기전>
역사를 바로 직시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란 과거에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현재에도 살아 움직이며, 또한 앞으로의 미래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할 수있어야 참 의미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역사적 평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당대의 시대 상황 및 배경에 따라 변화할 수는 있겠으나, 결코 진실이 왜곡되어서는 안되겠지요. 치욕의 역사라고해서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그 속에서 참된 교훈을 얻어 밝은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 있는 마음가짐이 보다 중요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점에서 요즘 일본, 중국의 역사 왜곡 문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남한산성 안에 들어간다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지요. 남한산성에서 항쟁하던 인조는 중과부적으로 끝내 성밖으로 나와 항복했습니다. 하지만 위급할 때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 쌓은 남한산성은 결코 함락되지 않았답니다. 이것은 몸은 비록 항복했지만 정신과 나라는 결코 항복하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오늘 치욕의 현장으로 느끼고 있는 남한산성에서 우리는 무얼 느낄 수 있을까요. 자랑스런 모습은 없을까요? 이제 우리 모두 우리 역사, 문화의 현장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들여다 보자구요. ........................................................................................
# 문화재란 무엇인가? :::::::::::::::::::::::::::::::::::::::::::::::::::::::::::::::::::::::::::::::::::::::::::::::::::::::::::: 만해 기념관
(만해기념관. -2002년 3월 12일 박물관 등록(제1종 박물관). 연건평 120평의 전통 한옥 2층으로 전시실, 세미나실, 자료실을 갖추어 만해의 정신을 계승하는 공간으로 활용.) 민족자존의 역사와 호국정신의 성지인 남한산성에도 만해 기념관이 98.5.20. 세워져 길손을 반기고 있다..(전보삼 교수가 사재를 털어 건립.) 기념관에는 만해의 모든 자료가 가지런히 잘 정리되어 만해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다.
만해 기념관 내부
나룻배와 행인 시비
나는 나룻배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나룻배
관람료 : 어른 - 1,000원, 청소년 - 500원 ............................................
만해 한용운 스님은 조선 왕조 말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8월 29일 충청도 홍주땅(지금은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한응준(韓應俊)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온양 방씨이며, 어렸을 때의 이름은 유천(裕天)이었다.
이렇게 뛰어난 유천의 재능에 대하여 조용한 두메산골에서는 칭찬이 자자하게 퍼져 나갔다. 그 무렵 개화파 주도의 갑신정변(1884)이 삼일천하의 비극적 막을 내린 후일담이 충청도 땅에까지 퍼지더니, 박영효의 《건백서 건백서》가 올려지고, 자유민권사상이 대두되면서 국운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 아버지 한응준은 어린 유천을 불러놓고 세상 형편과 국내외 돌아가는 정세를 소상히 설명하여 주었다. 그는 후에 선친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여기에서 훗날의 만해 스님을 이해하는 데 선친의 가정교육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선친으로부터의 감화와 더불어 당시 국내외의 불안한 정세도 만해로 하여금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에 눈떠가게 하였다.
우리나라는 일본, 청 러시아의 싸움터가 되었고 조정에서는 수구파와 개화파, 여기에 겹쳐 친일파, 친청파, 친러파 등의 정권 싸움으로 백성들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는 혼돈의 연속이었다. 급기야는 1894년에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그 기세는 삽시간에 정읍, 태인, 김제, 전주를 함락했다. 전라도를 거의 손에 넣은 동학군은 충청도 땅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전 충훈부도사 한응준의 재등용을 요청하는 교지를 내렸고, 청나라 군이 조정의 요청에 의하여 출병하자, 일본군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리하여 청일전쟁은 이땅을 무대로 참화의 비극을 토해내고 말았다. 16살의 유천도 동학란과 청일전쟁의 격동기에 이땅에 살면서, 민중과 함께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통 속에서 그는 역사의 현실을 통감했고, 나아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같은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야 하는 인생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덧없는 것이 아닌가. 밤낮 근근 살자 하다가 생명이 가면 무엇이 남는가. 명예인가, 부귀인가, 모두가 다 아쉬운 것이 아닌가. 결국 모든 것이 공(空)이 되고, 무색(無色)하고 무형(無形)한 것이 되어 버리지 않는가.
그러한 혼란과 갈등은 드디어 을미사변(1895)이란 거센 소용돌이로 이어지고 나라는 온통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지경이 되어갔다. 그럴수록 유천의 심중에 일어나는 갈등과 회의도 커져만 갔다. 자고 나면 소란스러움은 더해갔고,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나라가 망한다고까지 하는데, 그것은 도대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란 말인가? 그는 참으로 답답한 심정이 아닐 수 없었다. - 힌용운의 일대기 중 역사 앞에서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 공동 묘지에 안장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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