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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답사 여정/ 문화재란/만해 기념관 손병주 2007-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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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s1930.onmam.com/bbs/bbsView/62/763797

 

* 우선 간단히나마 6.6.(수) 남한산성 여정을 소개합니다.

    금번은 남한산성 중 일부를 답사하게 되는데, 현지 사정 및 여건에 따라 약간의 변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102, <수어장대에서 삼학사(三學士)를 생각하노라!>도 참조하시길...

 

 * 여정 : 남한산성 답사.


 만해 기념관 - 행궁 - 금림조합 불망비 - 침괘정 - 영월정 - 숭열전 - 수어장대, 청량당 - 병암 - 서문 - 연주봉 옹성 - 북장대지 - 북문 - 연무관- 역사  전시관 - ( 현절사)

 

 

산성전도

 

 아래의 산성도를 참고하세요.

 


 

< 남한산성 답사  떠나기전>

 문화유산을 답사한다는 것은 '나의 발로 내가 직접' 역사 문화의 현장을 찾는다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현장은 옛 모습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나름대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무한한 상상력을 통해 옛사람들의 자취를 더듬어 당시의 삶이나 생활상 등을 그려보는 의미도 실로 깊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면 중요 고비고비마다 위정자들의 권력다툼이 자신들의 정치적 야욕이 백성을 위한 방향으로 향하지 못할 때 그 피해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데 있습니다.

 역사를 바로 직시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역사란 과거에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현재에도 살아 움직이며, 또한 앞으로의 미래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할 수있어야 참 의미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역사적 평가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당대의 시대 상황 및 배경에 따라 변화할 수는 있겠으나, 결코 진실이 왜곡되어서는 안되겠지요.
 치욕의 역사도, 영광의 역사도 모두 우리 선조들이 살아 온 흔적이며, 엄연한 사실입니다.

 치욕의 역사라고해서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그 속에서 참된 교훈을 얻어 밝은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 있는 마음가짐이 보다 중요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점에서 요즘 일본, 중국의 역사 왜곡 문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작게는 우리 고장의 문화유산을 소중히 여겨, 못난 것은 못난 것대로, 잘난 것은 잘난 것대로 더욱 애정을 갖고 아끼면서, 우리들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바로 세워나가야 할 것이며, 크게는 모순되고 잘못된 것을 극복함으로 역사가 가르치는 진실을 갖추어 나감으로써 우리 민족이, 더 나아가서는 온 인류가 함께 보듬고 살아나가는 '인류에의 실현의 길'이야말로 역사를 진정 바로 보는 것이리라 여겨지는군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는 항복의 조건으로 인조에게 성밖으로 나오라고 했답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남한산성 안에 들어간다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지요.

 남한산성에서 항쟁하던 인조는 중과부적으로 끝내 성밖으로 나와 항복했습니다.

 하지만 위급할 때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해 쌓은 남한산성은 결코 함락되지 않았답니다.

 이것은 몸은 비록 항복했지만 정신과 나라는 결코 항복하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몸은 항복해도 정신과 나라는 항복하지 않는다"는 우리 선조들의 기개 아닌가요!

청나라에 잡혀가서 '우리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오직 대의일 뿐, 이기고 지는 일과 존망은 논할 바가 아니라"며, 굳은 절의와 불요불굴의 당당한 태도로 청태종조차 감탄한 조선의 기개를 널리 떨치며 숨져간 삼학사 등 선조들의 정신에 우리는 부끄러워지지 않을까요?

 자!

 오늘 치욕의 현장으로 느끼고 있는 남한산성에서 우리는 무얼 느낄 수 있을까요.

 자랑스런 모습은 없을까요?

 이제 우리 모두  우리 역사, 문화의 현장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들여다 보자구요.

* 성남시 상징물
   나무: 은행나무, 꽃: 철쭉, 새: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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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란 무엇인가?

문화재는 조상들이 남긴 유산으로서 삶의 지혜가 담겨 있고 우리가 살아온 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입니다.
우리가 유적답사를 가면 볼 수 있는 성곽·옛 무덤·불상이나 불탑, 그리고 옛 그림·도자기·고서적 등을 비롯한 유형의 것을 유형문화재라 하며, 판소리·탈춤과 같이 형체는 없지만 사람들의 행위를 통해 나타나는 것을 무형문화재라고 한답니다. 또한 자연유산으로서 일상생활 및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중요하여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을 천연기념물이라고 하여 문화재에 포함하기도 하지요.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기념물, 민속자료로 크게 나뉘어진답니다.



* 유형문화재
건조물·전적·서적·고문서·회화·공예품 등 유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적 또는 학술적 가치가 큰 것. 또는 이에 준하는 고고자료. 예; 수어장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호)

* 무형문화재
연극·음악·무용·공예기술 등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적 또는 예술적 가치가 큰 것.
예: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

* 기념물
성곽·옛 무덤·궁궐·도자기가마터 등 사적지로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큰 것, 경승지로서 학술적·경관적 가치가 큰 것 및 동물·식물·광물·지질·동굴·특별한 자연현상 등 생성물로서 역사적·예술적 또는 학술적 가치가 큰 것. 예: 남한산성(사적 제 57호), 이수선생묘(경기도 기념물54호)

* 민속자료
의식주·생업·신앙·연중행사 등에 관한 풍습·관습과 이에 사용되는 의복·기구·가옥 등으로서 일상생활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
예: 수내동가옥(경기도 문화재자료 제78호)

조상들이 남겨놓은 유형·무형의 문화재는 우리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중요할 뿐 아니라 앞으로의 문화 발전에 바탕이 되기 때문에 현상대로 보존되어야 하며, 우리가 잘 지키고 가꾸어 후손에게 길이 물려주어야 할 값진 재산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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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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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기념관

  민족 자존의 역사가 있는 남한산성, 호국정신의 성지인 산성내에 있는 만해 한용운의 기념관 여기에는 만해의 모든 자료가 잘 정리 되어 전시되어있다.


(만해기념관. -2002년 3월 12일 박물관 등록(제1종 박물관). 연건평 120평의 전통 한옥 2층으로 전시실, 세미나실, 자료실을 갖추어 만해의 정신을 계승하는 공간으로 활용.)

 민족자존의 역사와 호국정신의 성지인 남한산성에도 만해 기념관이 98.5.20. 세워져 길손을 반기고 있다..(전보삼 교수가 사재를 털어 건립.)
 기념관에는 만해의 모든 자료가 가지런히 잘 정리되어 만해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의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만해 기념관 내부


 만해기념관 경내에는 우리들의 눈에 익었던 님의 침묵 중 "나룻배와 행인의 시비"가 있고, 그 옆 자리에는 원로 조각가 민복진 선생의 작품인 만해의 "흉상"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나룻배와 행인 시비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관람료 : 어른 - 1,000원, 청소년 - 500원
* TEL (031)744-3100 * FAX 744-3190 * 주소: 산성리 9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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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jpg (14209 bytes)(1879-1944)

 

 만해 한용운 스님은 조선 왕조 말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8월 29일 충청도 홍주땅(지금은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한응준(韓應俊)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온양 방씨이며, 어렸을 때의 이름은 유천(裕天)이었다.


어린 유천은 6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 공부를 시작하여 9살리 되던 해에 《서상기 西廂記》와 《통감 通鑑》을 독파하고 《서경 書經》에도 능통할 정도의 실력을 쌓았다.

 이렇게 뛰어난 유천의 재능에 대하여 조용한 두메산골에서는 칭찬이 자자하게 퍼져 나갔다.

그 무렵 개화파 주도의 갑신정변(1884)이 삼일천하의 비극적 막을 내린 후일담이 충청도 땅에까지 퍼지더니, 박영효의 《건백서 건백서》가 올려지고, 자유민권사상이 대두되면서 국운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 아버지 한응준은 어린 유천을 불러놓고 세상 형편과 국내외 돌아가는 정세를 소상히 설명하여 주었다. 그는 후에 선친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나는 선친에게서 조석으로 좋은 말씀을 들었다. 선친은 서책을 읽다가 가끔 어린 나를 불러놓고 역사상 빛나는 의인결사의 언행을 가르쳐주시며 세상 형편, 국내외 정세를 알아듣도록 타일러 주셨다. 이런 말씀을 한 번 두 번 듣는 사이에 내 가슴에는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고, ' 나도 그 의인 결사와 같은 휼륭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이 글은 〈시베리아 거쳐 서울로〉란 글의 한 구절이다.

여기에서 훗날의 만해 스님을 이해하는 데 선친의 가정교육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선친으로부터의 감화와 더불어 당시 국내외의 불안한 정세도 만해로 하여금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에 눈떠가게 하였다.


한편 국내 사정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외국 세력이 점차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는 일본, 청 러시아의 싸움터가 되었고 조정에서는 수구파와 개화파, 여기에 겹쳐 친일파, 친청파, 친러파 등의 정권 싸움으로 백성들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는 혼돈의 연속이었다.

급기야는 1894년에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그 기세는 삽시간에 정읍, 태인, 김제, 전주를 함락했다. 전라도를 거의 손에 넣은 동학군은 충청도 땅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전 충훈부도사 한응준의 재등용을 요청하는 교지를 내렸고, 청나라 군이 조정의 요청에 의하여 출병하자, 일본군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리하여 청일전쟁은 이땅을 무대로 참화의 비극을 토해내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한학에 정진해 온 유천은 16세 되던 해에 서당의 훈장을 하고, 또 전정숙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여 세속적인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급박한 시대상황은 그에게 삶의 전환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16살의 유천도 동학란과 청일전쟁의 격동기에 이땅에 살면서, 민중과 함께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통 속에서 그는 역사의 현실을 통감했고, 나아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같은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야 하는 인생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덧없는 것이 아닌가. 밤낮 근근 살자 하다가 생명이 가면 무엇이 남는가. 명예인가, 부귀인가, 모두가 다 아쉬운 것이 아닌가.

결국 모든 것이 공(空)이 되고, 무색(無色)하고 무형(無形)한 것이 되어 버리지 않는가.


그는 깊은 늪 속에서 길을 잃었다. 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회상하여 보았으나 회의의 늪에서 나오는 길은 오히려 더 막막하기만 했다.


이렇게 유천이 회의의 늪에서 방황하고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점점 어두운 먹구름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으니, 갑오경장을 통해 수구세력으로서 귀족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자는 귀족들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오백년의 조선 왕조는 몰락의 길을 재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혼란과 갈등은 드디어 을미사변(1895)이란 거센 소용돌이로 이어지고 나라는 온통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지경이 되어갔다.

그럴수록 유천의 심중에 일어나는 갈등과 회의도 커져만 갔다.

자고 나면 소란스러움은 더해갔고,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나라가 망한다고까지 하는데, 그것은 도대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란 말인가?

그는 참으로 답답한 심정이 아닐 수 없었다.

                   - 힌용운의 일대기 중 역사 앞에서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  공동 묘지에 안장되다.


   

  main.jpg (27006 bytes)     


 * 출처: http://www.manhae.or.kr/remember.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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